커뮤니티 Q&A 상세 페이지
메이커스마크 증류소 이야기 -상편- 핸드메이드 감성의 위스키 증류소.
안녕하세요- 블로거로 활동중인-
버번쟁이 클라이머
버클입니다-
빠빠빨간맛- 궁금해-♬
네, 빨간 왁스탑하면 생각나는 버번 위스키.
버번 입문 삼대장 하면 생각나는 그 버번 위스키.
바로- 메이커스 마크-입니다.
그리고 이 버번 위스키.
버번 중에서도 몇 안되는
'E'가 없는 위스키 이기도 합니다.
그리고 이 메이커스 마크 병에 있는 왁스탑과 라벨 모두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으로 유명-합니다.
이에 더해 옛날에 있었던 핸드메이드-라는 그 말 때문에 고소 까지 당한 이 버번 위스키.
그 이야기 한번 시작해 보겠습니다.
메이커스마크의 역사가 시작한건
1680년대 스코틀랜드에서부터
미국 펜실베니아로 이주하면서 부터-입니다.
원래 태생이 스코틀랜드 농부이자
위스키 증류업을 했던 1대 새뮤얼스는
스코틀랜드에서 했던 것처럼
증류업을 했었습니다.
그러다 1784년에는
펜실베니아 주에서
버지니아주로 또 이주하게 됩니다.
하지만-
1792년에 버지니아주가
분리되면서 1대 세뮤얼스가 살던 지역이
켄터키주가 되면서 자연스럽게
켄터키주 주민이 됐습니다.
그리고 이 즈음부터
켄터키의 위스키에 대한 세금이 줄어들면서
1840년대에는 정식으로 면허를 신청하게 됩니다.
이때 면허를 신청한 사람이,
테일러 새뮤얼스
정식 면허를 신청하고도
1919년까지는 잘 운영해오던 증류소-였습니다.
그 일이 오기 전-까지는요.
그일이 뭐냐-하면
바로.. 금주법-입니다.
그동안.. 메이커스마크 증류소도
어쩔 수 없이 증류소 문을 닫게 됩니다.
새로 증류소 문을 열게 되는 날-
4대손이 가문의 레시피로 만든 위스키 맛을 보는 순간-
위스키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
다시- 문을 닫게됩니다.
그리고는 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.
(아니 그럼 뭐 먹고 살아요.. 처자식도 있으신 분이)
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
지금의 증류소 부지를 매입합니다.
그리고-하나의 퍼포먼스를..
하십니다.
바로.. 대대로 내려오던 위스키 제조방법이 적힌
그 종이를
불에 태웠습니다.
그리고 이때, 따님분이 화상에 입을 뻔하고-
집이 탔다고 합니다-
레시피..도 불에 태웠으니
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해진
빌 새뮤얼스.
그런데- 처자식 중에
아내분이 이때 지대한 공헌을 하십니다.
마저리 새뮤얼스 여사께서
곡물 비율이 메시빌을 가지고
빵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.
응..? 빵..? 이게 왜 대단한건데??
하신다면-
위스키-라는 것이 한번 메시빌을 시험하면
적어도 2년은 있어야 어느정도
윤곽이 나옵니다.
하지만, 지금 새뮤얼스네는-
이렇다할 수입이 없다보니
하루하루가 바빴고,
때문에 빵을 구워서 맛 보면서
위스키 맛을 추축하는 방법이
획기적이었던 겁니다.
빵을 굽는 그 곡물 비율에 대한 조언은
놀랍게도 지금 버번의 끝판 왕이라고 불리는
패피 밴 윙클에게서 조언을
구했다고 합니다.
그래서 완성된 지금의 메시빌이-
옥수수 70%, 붉은 겨울 밀 16%,
맥아 14%입니다.
패피 밴 윙클도 밀 버번이다보니
이런 조언과 메시빌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.
메시빌도 완성 됐겠다-
가장 중요한 버번의 이름을-
정해야했는데,
마저리 여사께서
당시 수집하던 장인의 표식이 적힌
가구들을 보여주면서
"우리의 위스키도 장인이 만들었으니
장인의 표식이라고 이름 짓자"
라고 해서 Maker's Mark가 됩니다.
그리고 본인이 계산했을 때
4대째라 로마 숫자 4를
박아 넣었습니다-
하지만 이건 실수였죠..
본인 위의 2대를 빼먹었던 것인데-
나중에 아들이 2대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
찾아 냅니다.
어유- 글이 벌써 이렇게 길어졌군요,
다음 이야기는
메이커스 마크버번의 마케팅이
어떻게 이루어졌는지,
또 지금까지 이어지면서
겪은 우여곡절에 대해서
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.
지금까지 알아두면
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 좋은
버번 지식을 알려 드리는
달리에서 멘토로 활동중인
버번쟁이 클라이머,
버클이었습니다!